시대변화와 신문보도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과 이를 보도한 당시 신문을 만나보십시오

 

 

◾최초의 근대신문 <한성순보>

 

정부기구인 통리아문박문국에서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하여 열흘마다(매 1, 10, 20일 발행) 한번씩 발행하였으므로 순보라 불렸습니다.

 

기사는 순한문, 4호활자 1단제였다. 제1호는 18쪽이었으나 제5호부터는 24쪽 책자형으로 묶었습니다.

 

<한성순보>는 이듬해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 때에 박문국 청사가 불타버려서 폐간되었습니다. <한성순보>는 1호에서 36호(1884. 10. 9)까지 남아 있습니다.

     
 

<한성주보> 창간호

<한성순보>의 후신으로 1886년 1월 25일에 창간되었습니다.


<주보서> (한성주보창간사)

신문발행의 목적을 안으로는 백성을 교화, 밖으로는 외세로부터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한 것으로 적었습니다.


<한성주보>의 광고

독일무역회사 세창양행이 1886년 2월 22일자에 최초로 신문광고를 게재하였습니다.

 

◾ <한성주보>의 한글기사

한문 전용, 국한문 혼용, 한글 전용의 세 종류 기사가 있었으나 한글의 비율이 점차 줄어 제 40호 이후에는 한문으로만 제작하였습니다.

     
 

◾ <독립신문> 창간호 1896.4.7

1면에 <독립신문> 창간 정신을 밝혔습니다.

상하귀천을 차별하지 않고, 정부나 일반인의 잘못이 있으면 폭로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한글 전용의 필요성을 강조, 초기엔 주 3회 발행 1898년 7월부터는 일간이 되었습니다.

1면에 논설을 싣고 2, 3면에는 국내외 기사 3면에는 광고를 실었습니다.

     
 

◾ <협성회회보>

배재학당 학생회인 협성회가 1898년 1월 1일에 창간, 편집체제와 내용은 종합지의 성격이었고, 일반을 상대로 판매도 했습니다.

4-6배판 2단제, 한글 전용으로 1면에는 논설, 2-3-4 면에 걸쳐서 내보와 외보, 맨 마지막에 협성회의 소식인 <회중잡보>를 실었

습니다.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주간으로 발행하던 <협성회회보>를 폐간하고 1898년 4월 9일 일간으로 발행, 열강세력에 대한 자주, 정치·사회의 개혁을 주장 하였습니다.

 

1899년 4월 4일 경영난과 정치정세의 변화에 따라 폐간했습니다.

     
 

◾ <뎨국신문> 1898.8.10~1910.8.2

이종일이 창간한 한글전용 신문으로 국한문 혼용의 <황성신문>과 대조적이었으며 독자대상도 중류층과 부녀자가 많았습니다.

 

기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첫 대판 신문이었습니다.

     
 

◾ <경성신문>

윤치호를 사장으로 1898년 3월 2일에 창간된 주 2회 발행된 신문이었습니다. 4월 6일(제11호)부터 대한 <황셩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습니다.


◾ <대한황셩신문>

<경성신문>이 제호를 <대한황셩신문>으로 바꾼 후에도 사장은 윤치호였고, 주필은 유근이었습니다. 9월 5일에 제호를 <황성신문>으로 다시 바꾸고 일간으로 발전했습니다.


◾ <황성신문>

주식회사 형태인 고금제 합자회사로 1898년 9월 5일 창간된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였습니다.

 

국한문 혼용의 뛰어난 논설로 유명하였으며, 초대 사장 남궁억에 이어 1902년 8월부터 장지연이 사장이었습니다.

     
 

◾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 <황성신문> 사설

<황성신문>은 최초의 상업신문으로 특히 사설을 중시하였고,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에 분개 하여 11월 20일자에 우리나라 언론사에 가장 빛나는 〈시일야방성대곡-이 날에 목놓아 통곡 하노라〉를 실었으며, 한일합방이 되자 1910년 8월29일 처음으로 호외를 발행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 한말 최대의 항일민족지

영국기자 E.T 베델(한국명 배설)과 양기탁이 주도해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호를 발행했습니다. 발행인이 외국인이였기에 치외법권의 도움으로 검수 검열을 받지 않고 강경한 항일논조를 유지했습니다.

 

1905년 8월 1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영문판의 2개로 분리했고, 1907년 5월 23일에 한글판을 새로 창간하여 3개의 신문이 되었습니다.

분리 전 한글판은 가로쓰기 조판체재에 세로읽기 를 도입한 특이한 편집이었습니다.

 

◾ The Korea Daily News의 제1면 광고

전면을 광고로 채우고 2면부터 기사를 실었습니다. 제 1면을 광고로 채우는 편집은 당시대부분의 영국 신문이 채택한 방식이었습니다.

     
◾ 을사조약 체결 호외-1905년 11월 27일자 <대한매일신보>    
   
     
 

◾ 루비활자 편집의 <만세보>

1906년 6월 17일 천도교가 발행한 이 신문은 국한문을 혼용하면서 한자 옆에 한글로 작은 ’루비 활자’로 토를 달았습니다.


◾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

<만세보>에 실린 이인직의 <혈의 누>는 1906년 7월 22일부터 50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며 자주독립,신교육사상,자유결혼관 등을 다룬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이며, 최초의 신문 소설이었습니다.

 

◾ <대한민보>

최초로 일기예보와 시사 만화를 개재 1909년 6월 2일에 창간한 <대한민보>에 만평이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동양화식 목판작업으로 <삽화>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 최초의 신문만평 작가는 이도영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의거 1909.10.26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입니다.

 

 

   
     

◾순종 황제의 칙유

1910년 8월 29일에 순종황제는 경술국치를 승인하는 칙유(勅諭)를 내렸습니다.


◾ 경술국치의 날

<매일신보>에 실린 순종의 경술국치 조칙을 알리는 1910년 8월 30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