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탄생과 발자취입니다.
최초의 신문은 BC 59년에 등장한 '악타 디우르나' 입니다.

 

수 세기동안, 고대 로마사람들은 정보와 소식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인쇄매체를 사용해왔습니다. BC 59년 등장한 로마 시대의 악타 디우르나 (Acta Diurna)는 최초의 ‘신문’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대중에게 중요한 사회적·정치적 사건을 알리고자 했던 율리어스 시저는 다가올 행사에 대한 정보를 각 주요 도시에 전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쓰여진 채 공중목욕탕과 같은 공공장소에 전시함으로써, 악타는 시민들에게 정부 스캔들, 군사 캠페인, 재판과 처형 등을 알렸습니다. 손으로 쓰는 1쪽 신문(지편)은 8세기 경 중국 베이징에서 처음 생겨났습니다.

 

 

1447년 요한 구텐베르그의 활판인쇄 발명은 근대 신문의 시대를 예고했습니다. 구텐베르그의 기계는 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특징인 ‘자유로운 아이디어 교환과 지식의 확산’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늘어나는 상인계층에게 무역과 상업과 관련한 소식을 제공 하는 소식지가 생겨난 것도 이 무렵 입니다. 인쇄된 1쪽 신문(지편)이 15세기 말 독일의 도시에서 배포됐으며 이러한 팜플릿은 종종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떤 것은 드라큘라 백작으로 알려진 블라드 체페슈드라큘의 손에서 고통 받는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게르만인들의 학대 실태를 보도했습니다. 1556년 베니치아 정부는 Notizie scritte를 발간했으며 독자들은 동전이나 ‘가제타’ (화폐 단위)로 요금을 지불했습니다.

 

 

17세기 초, 신문은 정기적이고 자주 발간되는 간행물의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근대 신문은 독일,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영국과 같은 서부 유럽에서 발행됐습니다. 이러한 간행물들은 주로 유럽 소식을 다루었고, 종종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시아 지역의 정보를 싣기도 했습니다. 이 신문들은 국내 이슈는 거의 다루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영국 신문이 프랑스 군대의 실책을 보도하는 반면, 프랑스 신문은 최근 일어난 영국 황실의 스캔들을 다루었습니다. 

 

17세기 말이 돼서야 신문 콘텐츠는 지역 이슈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검열은 사회 전반에서 이뤄지고 있었고 시민들의 반감을 자극할 만한 사건을 보도 하는 것은 대부분 금지되었습니다. 영국 시민 전쟁 종식 후, 올리버 크롬웰이 찰스1세의 처형 전까지 모든 뉴스매체 발표를 억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문은 1면에 그의 참수 소식을 발표했습니다. 1766년 스웨덴에서 처음으로 언론자유를 보호하는 법이 통과됐습니다. 

 

1844년 전신의 발명은 인쇄매체를 변화시켰습니다. 정보는 이제 분 단위로 전달되기 때문에 훨씬 더 시의적절하고 광범위한 보도가 가능해졌습니다. 신문은 전 세계 곳곳에서 생겨났으며 일본 최초의 신문인 Yokohama Mainichi Shimbun이 1870년 창간됐습니다. (휴대가능한 인쇄매체는 16세기 말에 이미 일본에 도입됐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 신문은 정보를 전달하고 또 전달받는 주요 수단이 되었습니다. 인쇄매체의 ‘글로벌 시대’로 알려진 1890~1920년에는, William Randolph Hearst, Joseph Pulitzer, and Lord Northcliffe 같은 언론 귀족들이 거대한 출판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이들은 미디어 산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방식으로 인해 악명을 떨쳤습니다. 

 

신문은 또한 혁명 선전용 도구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1900년 레닌이 발간한 Iskra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1925년 6월 21일, 베트남에서는 국내에 마르시즘 도입과 혁명의 전략 정책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Thanh Nien을 처음으로 발간했습니다. 

 

 

 국내 신문의 역사

 

 

우리나라에서도 근대신문이 발행되기 전부터 <조보(朝報)> 또는 <기별(奇別)>이라 불리는 관보성격의 신문이 있었습니다. 이 전근대적 신문 형태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 또는 15세기 무렵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보>는 승정원에서 발표하는 자료들을 각 관청의 기별서리(寄別書吏)들이 손으로 베껴서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과 양반층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조보>의 내용은 관보적인 성격으로 국왕의 동정과 관리의 임면 등이 대부분이었으나 일반 사회기사의 성격을 띤 것도 함께 실었습니다. 조보는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와 <한성주보(漢城周報)>가 발행되기 전까지 존재하다가 1894년 정부가 정식으로 인쇄된 <관보(官報)>를 창간하고, 이듬해에 승정원이 공사청을 폐지하면서 없어졌습니다. 

 

1) 개화기의 신문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은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된 <한성순보>입니다. 이 신문은 정부기구인 박문국에서 월 3회 발간했으며, 당시의 개화파들이 국민에게 외국의 사정을 널리 알려 개화사상을 고취시키려는 데 큰 목적을 두었습니다.일본에서 들어온 기계와 활자로 인쇄한 A4판 비슷한 판형의 24쪽 책자였습니다. 국제정세와 외국 문물, 역사를 비롯해 과학·지리·천문 등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한성순보>는 창간 이듬해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폐간됐으나, 1886년 1월 25일에 다시 <한성주보>로 복간돼 88년까지 발행됐습니다.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입니다.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은 <독립신문>은 성격과 내용에서 한국 신문 사상 획기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우선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단행해 누구나 읽기 쉽게 했습니다. <독립신문>은 사실 보도와 논평, 비판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가르쳤고,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웠던 때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영문판을 통해서는 외국인에게 국내의 사정과 여론을 알렸습니다. <독립신문>에 자극 받아서 한글로 된 민간 신문들이 잇따라 창간되었습니다.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제가 한국 침략의 야욕을 공공연하게 드러냈고, 언론은 이에 맞서 항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써 구속되고, <황성신문>은 정간됐습니다. 민족 신문들은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하며, 통감 정치를 비난하는 등 구국운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일본인과 친일 인사에게 친일신문을 만들게 했습니다. 이 때 이완용 친일 내각은 기관지 <대한신문(大韓新聞)>을 발행했습니다.

 

2) 일제 하의 신문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민간신문들은 모두 폐간됐습니다. 총독부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제호를 <매일신보(每日申報)> 로 바꿔 기관지로 만들었습니다. 

 

3·1운동 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구호를 내걸고 회유책을 쓰면서 1920년 1월 한국인에게 세 가지 민간지 발행을 허락했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일보(朝鮮日報)>가 그 해 3월 5일 창간호를 냈고 <동아일보(東亞日報)>와 <시사신문(時事新聞)>이 4월1일 각각 창간됐습니다. 민간지들은 한민족의 이익을 수호하는 신문으로서 민족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수없이 신문의 압수와 정간을 당한 신문사들은 경영상 어려움을 겪었으며, 언론인들은 잦은 필화로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많은 신문들이 1940년 8월10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간되었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만 남았습니다.

 

3) 미군정 시기의 신문

1945년 광복이 되자 신문업계가 가장 먼저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미군정은 완전한 언론 자유를 약속하며 신문 발행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꾸었습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신문이 창간됐습니다.

 

서울에서 한글판 신문 <조선인민보>가 먼저 창간됐으며, 지방에서 <민중일보><자유신><대동신문>등이 잇따라 나왔습니다. 강제 폐간됐던 <동아일보><조선일보>가 1945년 11월 하순 무렵 복간되면서 신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등록된 신문·잡지 등 정기간행물이 무려 242종이나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신문들은 자사의 주장을 뚜렷이 내세우는 정론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언론인에 대한 테러와 신문사 습격, 기물파괴 등 무질서한 상황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혼란과 좌익언론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 미군정 당국은 1946년 5월 29일에 군정법령 제88호를 공포하여 군정실시 초기에 내세웠던 언론정책을 크게 바꿔 신문발행을 허가제로 환원시켰습니다. 이 법령은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신문발행을 억제하는 근거가 됐습니다. 

 

4) 자유당·민주당 시대의 신문

이때는 신문계가 안정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각 신문사는 전시판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휴전 후 서울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정부는 독재를 비판하는 신문을 억압하기 위해 수차례 언론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만들려 했으나 신문들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문 발행 허가를 억제했기 때문에 신문의 수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1957년은 국내 신문이 스스로의 사회적 위상을 인식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역사적인 해입니다. 3월29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발기인 회의를 갖고, <독립신문>이 창간된 날인 4월 7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창립총회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협회는 매년 4월 7일부터 15일까지를 신문주간으로 설정하기로 했습니다. 편집인들은 신문의 자유와 책임, 타인의 명예와 자유, 품격 등을 다룬 ‘신문윤리강령’을 채택했습니다.

 

1960년 3월15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데모가 전국에서 일어나자 신문들은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민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습니다. 4·19혁명 후 개정된 헌법이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한다(제13조)”고 규정해 신문 발행은 등록제로 환원됐습니다. 수많은 신문·잡지가 창간됐고, 완벽한 언론 자유가 보장됐으나 사이비 기자가 횡행하는 등 부작용도 나타났습니다.

 

5) 군부독제·신군부 시대의 신문

1961년 5·16쿠테타 직후 군사정부는 '신문·통신사 시설 기준령'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신문은 조·석간으로 하루에 두 번 발행되지 않고 조간 또는 석간으로 한 번만 나오고 일요일자는 발행되지 않게 됐습니다. 수차례의 언론 통폐합으로 신문의 수가 크게 줄기도 했습니다. 1965년 9월 22일 창간된 <중앙일보>는 이듬해 국내 최초의 컬러 신문을 만들어 컬러 신문 시대를 열었습니다.

 

정부는 언론을 기업으로 육성하고 신문의 내용을 향상시키는 언론정책을 폈고, 신문은 차차 권력 앞에 굴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은 기업화·상업화되었고 더욱 더 밀접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이 시기에 신문은 고유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독재는 막을 내렸습니다. 12·12사태를 거쳐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본격적인 언론 탄압에 나섰습니다. 정기 간행물 대규모 등록취소에 이은 언론 통폐합으로 지방 각 도는 1가지 일간지만 남았고, 서울에는 조간과 석간 각각 3가지만 남았습니다. 정부는 1980년 12월31일 언론기본법을 제정·공포 하는 한편 보도 지침 등을 통해 언론을 사실상 통제했습니다.

 

정부가 새로운 신문 발행을 허용하지 않아 기존 신문사들은 큰 이윤을 남기는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또한 높은 보수와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게 된 언론인들은 안주하는 모습을 보여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6) 민주화 이후의 신문

6·29선언 이후 신문업계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정기간행물의 등록이 자유로워지자 일간지와 주간지가 늘어났고, 재벌과 종교단체가 새로운 신문사를 설립했습니다. 아울러 이윤을 추구하는 신문사들이 신문 면수 늘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광고를 많이 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이즈음 신문에 나타난 변화 중 하나는 가로짜기 편집입니다. 1980년대 들어 일부 신문이 부분 가로짜기 편집을 시작했습니다. 또 전문가의 의견을 따로 싣거나 독자의 의견을 싣는 '오피니언' 지면을 확대했습니다. 다른 변화는 하나로 묶여있던 신문을 내용에 따라 두 개 이상으로 쪼개 별지 형태로 만드는 섹션 편집입니다.

 

오늘날 신문사들은 뉴미디어에도 관심을 갖고 신문사 내에 뉴미디어 사업 전담 부서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보 데이터베이스(DB)의 개발, CD-ROM제작, 인터넷 신문, 동화상 뉴스 전광판 설치, 유선방송 진출 등 사업을 다각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