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7일은 신문의 날입니다.

 

 

신문의 날 4월 7일은 서재필이 1896년 ‘독립신문’ 창간호를 찍은 날입니다. 언론계는 이를 기려 1957년 이 날을 ‘제 1회 신문의 날’로 제정했습니다. 하지만 신문의 날을 제정키로 실제로 결정한 것은 1957년이 아니라 1959년 3월입니다. 때문에 신문의 날 첫 행사는 ‘제 3회 신문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졌습니다. 굳이 2년을 소급한 것은 1957년이 독립신문 창간 61주년이기 때문입니다. 독립신문에 대한 선배언론인들의 존경심을 가늠케 하는 대목입니다.

 

한글판 위키피디아는 서재필에 대해 10만 자 이상의 분량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근대사에 남긴 가장 깊고 뚜렷한 발자취는 독립신문의 창간입니다. 서울 서대문독립공원에 있는 그의 동상도 독립신문을 말아 쥔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고 서있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의 주모자였던 서재필은 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10년 후 일어난 갑오경장 덕분에 정세가 바뀌었음을 뒤늦게 알고는 1895년 12월 귀국했습니다. 당시 김홍집 내각은 그를 외부협판(외무차관)에 내정했습니다. 그러나 서재필은 “갑오개혁 성공을 위해서는 신문을 통해 개화의 필요성을 알리는 일이 더 시급하다”며 입각을 거절했습니다. 내각으로서도 널리 개혁의 취지를 알려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졌지만 친러 정권도 신문의 필요성엔 공감했습니다. 새 정부는 서울 정동에 있는 정부소유 한옥을 독립신문 사옥으로 빌려줬습니다. 서재필은 사장 겸 주필로 사설을 집필했습니다.

 

그해 7월 독립신문의 전폭적 지지 아래 독립협회가 결성됐습니다. 하지만 이때쯤부터 개혁파와 집권 친러 수구파 간에 대립이 깊어지면서 탄압이 시작됐습니다. 특히 1897년 8월 이후 러시아가 내정간섭과 이권침탈을 일삼자 펜촉은 몹시 날카로워졌고 정부와의 갈등도 심화됐습니다. 

 

목숨을 노리는 자객까지 얼씬대자 견디다 못한 서재필은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윤치호가 물려받은 필봉은 더욱 거침없었습니다. 탄압 방식 또한교묘해져 1899년 정부는 윤치호를 ‘덕원 부사 겸 원산 감리’라는 외직(外職)에 봉해 서울을 떠나게 했습니다. 신문이 아펜젤러를 주필로 내세워 속간을 결정하자 정부는 사옥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반환이 힘들면 신문사를 정부에 팔라”면서…. 물론 정부가 탐한 것은 사옥이 아니었습니다. 정부는 독립신문사를 매수하면서 “아일랜드 사람을 주필로 고용해 속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매수 후 1899년 12월 영영 폐간시켜버렸습니다. 비록 독립신문이 나라의 독립에 헌신했고 논조도 독립적이었지만 재정적 독립만큼은 이루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언론의 재정적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일깨워주는 대목입니다. 

 

사실 국내최초의 근대신문은 정부가 발행한 한자 신문 ‘한성순보’입니다. 독립신문은 그 뒤 태어났고 짧은 기간 존속했지만 개화기 사회발전과 민중계몽을 위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신문의 날을 이 날로 정한 선인들의 결정에 공감과 경의를 표합니다. 다시 60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그 결정은 현직 언론인들에게 시대에 대한, 역사에 대한, 공동체에 대한 신문인의 사명을 되뇌게 합니다. 

 

신문협회는 매년 ‘신문의 날 표어’를 선정 발표해왔습니다. 1959년 첫 작품이 ‘언론의 자유’였고 이듬해 ‘악법의 철폐’ 그 다음엔 ‘신문의 책임’이었습니다. 당시 시대상을 짐작케 합니다. 요즘은 ‘시대가 빨라질 때, 신문은 깊어집니다’ ‘정보가 넘칠수록 신문은 더욱 돋보입니다’ 등입니다. 정보통신기술(ICT)이 주도하는 다매체 시대라지만 시대적 아젠다를 설정하고 미래를 제시하는 일만큼은 신문이 담당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